[커버 스토리 | 슬롯 머신 프로젝트③] 석금호 슬롯 머신 의장
한국인이 생각하는 한국인은 감정적이다. 반면 ‘한국인 석금호’는 보다 단단한 실체를 갖고 있다. 슬롯 머신의 조형적이고 음운학적인 탁월성, 그리고 디자이너 세종의 창제 정신이었다.
문상덕 기자mosadu@fortunekorea.co.kr 사진강태훈

석금호 슬롯 머신 의장은 ‘한글날 낯설게 보기’를 제안했다. 국가 행사이니까 협조하자는 구시대의 논리가 아니다. 그는 “한글의 가치를 알면 한국인으로서 긍지를 가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우리 각자가 좀더 단단해지기 위해서, 이미 우리가 갖고 있는 한글을 제대로 보자는 뜻이다. 석금호 의장은 영어가 가득한 길거리의 음식점 메뉴판에서 ‘주눅 든 한국인’을 보고 있었다.
그가 40여 년간 일군 슬롯 머신 역시 낯설게 볼 필요가 있다. 클라우드를 품은 슬롯 머신은 10년간 몰라보게 바뀌었다. 컴퓨터마다 폰트를 일일이 다운로드받던 시대를 끝냈다. 만연하던 불법 복제, 그리고 폰트 회사와 사용자의 소송전도 끝냈다. 그 힘으로 슬롯 머신은 지난해 코스닥시장에 상장했다. 나아가 해외 폰트를 개발하고, 폰트 외의 콘텐츠까지 제공하는 ‘콘텐츠 오리엔티드 회사’를 준비하고 있다.
MS 윈도의 기본 서체인 ‘맑은 고딕’, 본문용 폰트로 널리 쓰이는 ‘슬롯 머신 제비’ 등 숱한 폰트를 제작해 온 그에게 후배 디자이너들이 만든 ‘포춘’ 한글 로고들을 먼저 보여줬다.
Q 먼저 후배들의 작품을 총평하신다면.
애정을 가지고 진취적인, 실험적인 표현을 제대로 했습니다. ‘슬롯 머신의 아름다움을 이런 식으로도 표현할 수 있구나’라는 걸 보여줘서 놀라웠어요.
예를 들어서 마기찬 디자이너의 작품은 라틴과 슬롯 머신이 서로 엮이면서 역동적인 관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동시에 동양과 서양을 대비하고 있는데요. 동양과 서양, 슬롯 머신과 라틴이 개성을 마음껏 자랑하면서 역동적으로 엮이고,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는 형상이 대단히 멋있게 느껴졌습니다.
장가석 디자이너의 작품은 한자의 고유한 이미지를 슬롯 머신로 잘 표현했습니다. 동양적인 멋을 풍겨서 누구도 이 작품을 중국적이라고 보지 않을 것 같아요.
정현아 디자이너의 작품은 영문과 슬롯 머신이 절묘하게 조합돼 있어서 이것도 참 훌륭했습니다. 작품들을 보고 참 기분이 좋았습니다.
Q 의장님의 현업 때와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후배들이 실험적이죠. 더 과감하고. 과거에는 포멀하고 정석적인 디자인에 강세를 뒀다면, 요즘은 모험적인 시도를 많이 합니다. 그래서 마음에 들어요.

Q 의장님께선 슬롯 머신에 담긴 의미에 주목하시는 듯합니다. 사전에 뵀을 때 “슬롯 머신을 슬롯 머신답게”, 슬롯 머신의 창제 정신과 원리를 바탕으로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슬롯 머신의 모양, 외국인이 봐도 직관적으로 느끼는 뉘앙스에 집중하는 주니어들과 결이 다른 듯해 흥미로웠습니다.
지적 자산으로서의 슬롯 머신의 가치를 한국인들이 잘 모른다는 점에서 강조한 것입니다. 내재적인 가치가 곧바로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요. 그 내재적인 가치, 또 조형적인 기초를 확실하게 습득한 다음 표현은 자유로워야 합니다. 실험적이고, 모험적이고, 감각적이어야 합니다.
Q 문자마다 담긴 문화가 다르고 조형의 특징이 다릅니다. 여러 문자에 걸쳐 일관성 있는 폰트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글로벌 기업에서 모두 갖는 고민인 듯합니다.
시각적인 일관성만 강조하면 디자인에 문제가 생깁니다. 문자에는 그 나라의 문화가 담겨 있기 때문에, 시각적인 일관성을 추구하면서도 문화적인 특성을 살려줘야 해요. 그래서 어렵죠.
예를 들어 바탕체라고 해도 서양의 바탕체는, 센추리(Century)나 가라몬드(Garamond)를 말하거든요. 그 문화 자체가 펜으로 써서 나온 형태예요. 보통 글 본문에 쓰죠. 그런데 우리가 부르는 바탕체는 명조체입니다. 명조체의 바탕은 붓이에요. 시각적인 일관성을 추구하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어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같은 바탕체라도 문화적 특성을 남겨줘야 하죠. 그러면서도 시각적인 일관성을 줘야 해서, 굉장히 세심한 작업이고, 실수하기 어려운 작업입니다.
Q 의장님께서는 어떤 폰트를 즐겨 쓰십니까?
제 개성과도 관련 있는데, 심플한 걸 좋아합니다. 장식적인 건 싫어해요. 그러면서도 개성이 확실해야 합니다. 상반된 특징을 조화시켜야 해서 어렵지만, 가능합니다. 제가 만든 ‘슬롯 머신 제비’(1992년 출시)가 그런 특징을 적용한 서체입니다.
Q 사전에 드린 질문지는 MS 오피스의 기본 서체인 ‘맑은 고딕’으로 작성했습니다. 의장님께서 직접 MS 본사를 찾아 서체 개발을 설득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덕분에 굴림체를 쓰지 않아도 됐습니다. 맑은 고딕을 개발할 때는 어디에 주안점을 두셨습니까?
당시 굴림체를 10여 년 동안 쓰고 있었습니다. 1973년 일본 디자이너 나카무라 유키히로가 제작한 ‘나루체’가 기원인데요. 일본에서 한국에 수출하려고 슬롯 머신 나루체를 만든 게 원도에서 쓰고 있던 굴림체였습니다. 이런 한국의 정체성을 찾아볼 수 없는 서체가 널리 쓰이는 것에 대해서 마음이 안 좋았죠. 그래서 새로운 원도 기본 서체를 개발할 때 슬롯 머신의 정체성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서체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슬롯 머신의 아이덴티티는 철학적인 부분입니다. 슬롯 머신은 기능적인 글자면서도 다른 문자와 구별이 됩니다. 그리고 자소와 음소가 일치해요. ‘FORTUNE’이라고 하면 글자는 7개지만 음절은 2개지요. 그런데 슬롯 머신은 글자도 2개, 음절도 2개입니다. 이런 게 슬롯 머신의 아이덴티티에 녹아 있는 특징입니다. 이런 것들이 방해받지 않는, 명쾌하고 깨끗하고 맑은 시각적인 모양을 갖추길 바랐습니다.

Q 창제 원리로 들어가면 인문학이 될까요?
아니죠. 창제 원리야 말로 기능적인 부분입니다. 소리의 발성기관과 글자의 모양이 같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그’라고 발음하면 목에서 혓바닥이 꺾여서 앞으로 나옵니다. 또 소리의 밝고 어두움도 글자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오’는 밝은 소리죠. 글자 모양도 위쪽을 향합니다. 반대로 ‘우’는 어두운 소리죠. 글자 모양도 아래쪽을 향합니다. 이런 것들이 음운학적으로 깊이 연구한 결과물입니다.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 우리는 1만 1172자의 음절을 갖고 있습니다. 라틴 음절은 400여 개밖에 안됩니다. 소릿값의 차이가 큰 겁니다. 이것도 창제 원리의 결과물이죠. 어떻게 보면 세종대왕이야말로 뛰어난 디자이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Q 슬롯 머신과 폰트산업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사실 슬롯 머신이란 이름은 어릴 적부터 익숙했습니다. 컴퓨터 보급과 함께 커온 세대이니까요. 일종의 디자인 하우스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기업으로 만난 슬롯 머신은 스타트업처럼, 굉장히 빠르게 성장하는 회사였습니다. 클라우드를 장착한 것이 계기였던 것으로 압니다. 클라우드를 채택하게 된 계기부터 여쭙고 싶습니다.
사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었던 겁니다. 예전에는 플로피디스크, 그리고 CD에 폰트 파일을 저장해서 판매했지요. 소비자들은 그걸 사서 파일을 다운로드받았습니다. 두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불법 복제와 불편함. 불편함은 또 두 가지로 나뉩니다. 컴퓨터 저장장치 용량이 크지 않던 시절에 수백 개의 폰트를 다운로드받는 게 부담이었습니다. 그리고 내 것이 아닌 컴퓨터에서 같은 폰트를 쓰려면 CD를 갖고 가서 다시 다운로드받아야 했어요. 이동의 불편함이지요.
그러던 중 일본의 한 유명 폰트회사와 교류하기 시작했습니다. 패키지 상품 하나만 구매하면 여러 가지 라이선스 폰트를 쓸 수 있도록 하더군요. 거기서 모티브를 일부 얻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예 다운로드받지 않고 인터넷에 연결된 상태에서 폰트를 쓰도록 하면 어떨까? 컴퓨터를 끄면 사용하던 폰트 기록도 사라지는 형태였습니다. 그러면 세 가지 문제가 다 해결됩니다. 그런 콘셉트로 2012년 개발을 시작해서 2014년 클라우드형 폰트 서비스 ‘슬롯 머신구름’을 선보였습니다.
슬롯 머신은 지난해 연결 기준 매출 183억원을 기록했다. 전년 대비 52.6% 성장했다. 같은 해 영업이익은 80억원, 당기순이익은 92억원으로 전년 대비 각각 68.2%, 2045% 올랐다. 슬롯 머신 측은 “ ‘슬롯 머신구름’의 사용자 확장과 라이선스 매출 증가가 주효했다”고 설명했다. 특히 “주요 글로벌 고객사에 연구개발용 폰트 IP 사용권을 대여해 주면서 라이선스 매출액이 큰 폭으로 뛰었다”고 덧붙였다.
슬롯 머신 외 주요 폰트회사로는 미국의 모노타입(Monotype)과 일본의 모리사와(Morisawa), 중국의 한이(Hanyi)가 있다. 한이는 지난 2022년 선전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 이들 기업은 IP를 확보를 위한 기업 인수, 서비스 질적 향상을 위한 기술 개발 투자를 늘리고 있다.
폰트 시장은 생각보다 숨가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망할 각오로 한 겁니다. 정말 망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새로운 것이고, 사람들이 쉽게 쓸 것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웠으니까요.
Q 출시 초기 반응은 어땠습니까?
처음엔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어요. 클라우드 서비스 자체가 생소했습니다. 모험을 해야 했어요. 서비스를 알리려면 적어도 1년은 무료로 제공해야 한다. 게다가 무료로 제공하면 기존에 다운로드 방식으로 판매하던 상품은 살 이유가 없어진다. 다시 말해 1년 이상 매출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당시에 최대 2년간 직원들 임금을 줄 수 있는 돈을 대출받아 놓고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출시 1년 만에 이전 수준의 매출까지 올라왔습니다.
Q 가만히 있어도 불법 복제로 망하고, 모험해도 리스크가 무척 컸습니다.
그렇죠. 망할 각오로 한 겁니다. 정말 망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새로운 것이고, 사람들이 쉽게 쓸 것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웠으니까요.
Q 결과론일 수 있지만, 불법 복제에 익숙해져 있던 사람들이 어쩌다 돈을 내기로 결심했을까요?
불법으로 쓰면 불안하지 않습니까. 불안을 끝내자. 그 대신 가격을 많이 낮췄죠. 월 만원 지불하고 회원 등록을 하면 불법에서 자유로워진다. 그리고 우리는 불법 복제 단속을 중단했을 때지만, 타사에서는 단속을 이어 가고 있었어요. 심리적으로 불안이 커지는 상황에서 슬롯 머신구름이 나왔죠.
그리고 2020년에는 라이선스 구분을 없앴습니다. 기존에는 기업용, 영상제작용 식으로 라이선스를 구분했어요. 10여 가지 정도였는데, 가격이 다 달랐죠. 제가 사용자라도 기가 막힐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결단을 내렸어요. 우리가 가장 먼저 결단했는데, 처음엔 욕도 먹었습니다. 결국엔 다른 곳도 따라왔죠. (Q 시장 전체 파이는 커지는?) 네, 더 활성화됐습니다.
Q 2022년 코스닥시장에 상장했습니다. 4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비상장 하우스로 유지해왔는데, 상장을 결심한 계기는 무엇입니까? 보통 신사업 진출을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중요한 이유지만, 저는 규모를 키워야 지속 가능한 시스템을 만들 수 있다고 봤습니다. 그리고 기업공개를 해서 조직을 탄탄하게 만들고요. (Q 내부통제 시스템도 정비하고?) 맞습니다.
Q 슬롯 머신에서 새롭게 준비하거나 규모를 키우고 있는 사업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전부터 이야기했던 것이 ‘콘텐츠 오리엔티드 회사로 확장하자’였습니다. 폰트도 크리에이티브 콘텐츠 중 하나이지요. 그것과 연계할 수 있는 분야로 이미지, 음원이 있습니다. (※슬롯 머신은 2020년 음원 제작 및 유통업체인 ‘모스트콘텐츠’ 지분에 참여했으며, 자회사를 통해 디지털 스톡 콘텐츠 서비스를 운영하는 ‘비비트리’를 지난 5월 인수했다.) (Q 슬롯 머신이 클라우드를 품고 성장했듯, 10년 뒤에는 또 다른 모습이 돼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분야가 넓어지는 거죠. 폰트는 해외로 진출하고, 폰트산업 밖으로 나가서 규모를 키워보자.

슬롯 머신의 내재적인 정신과 가치.이걸 우리 국민들의 정신 세계를 뒤집어 엎을 정도로 강렬하게 파고들게끔 하는 사람이 있었으면 합니다.
Q 슬롯 머신날이 갈수록 루틴한 휴일로 여겨지는 것 같습니다.
슬롯 머신의 내재적인 정신과 가치. 이걸 우리 국민들의 정신 세계를 뒤집어엎을 정도로 강렬하게 파고들게끔 하는 사람이 있었으면 합니다. 슬롯 머신의 가치를 제대로 알면 한국인으로서 긍지를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제대로 배운 사람들이 미래에 어떤 역할을 하겠습니까? 긍지가 있기 때문에 어떤 분야에서든지 당당하게 능력을 발휘하고, 서양 문화에 주눅들지 않고 두각을 보일 겁니다. 슬롯 머신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런 확신이 있어요. 제가 그런 영향을 받았으니까요.
Q 의장님에게 한국인이라는 건 어떤 의미입니까?
정체성은 역사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인데요. 저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세종대왕의 슬롯 머신 창제 정신에서 찾았습니다. 백성을 사랑했고, 대의를 위해서 희생했습니다. 그런 결심으로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는 문자를 만들었다는 한 인간의 삶 자체가 존경스러운 것이죠. 저는 이것이 한국인의 정신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놓고 희생했던 그 정신. 그것이 한국인으로서 제 정신이라고 생각하고요.
Q 한국인이라고 하면 보통 분노, 한 같은 정서를 떠올리곤 하는데요. 의장님이 말씀하는 한국인은 실체가 한층 분명한 것 같습니다.
정체성이 뚜렷하지 않은 사람은 피해의식에 기대서 생각하기 쉽습니다. 우리가 당당하고 긍지가 있다면 ‘당신들 우리에게 나쁜 일 많이 했다, 그러면 안 된다, 잘 지내보자’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겁니다. 이렇게 가는 것이 바람직하죠. 물론 잊을 수는 없고, 잊어서도 안 되겠지요.